떠나신 지 벌써 한 해… 선생님의 ‘문화 사랑’은 영원히 기억[그립습니다]

  • 문화일보
  • 입력 2023-04-27 09:08
  • 업데이트 2023-04-27 11:18
프린트

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74년 이어령(가운데) 선생이 한국을 찾은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왼쪽)와 만났을 때 모습. 오른쪽이 필자. 삼성출판박물관 제공



■ 그립습니다 - 이어령(1934∼2022)

벌써 이어령 선생이 우리를 남겨두고 떠나신 지 한 해가 됐다. 오색으로 물들었던 형형색색의 단풍도, 찬연한 겨울 하늘을 타고 내려와 쌓였던 보현봉의 흰 눈도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쳤던 시간이었다. 가슴이 뻥 뚫려서인지 시각의 그물망에도 걸리지 않고 통과해버린 탓이다. 선생과 쌓은 짧지 않은 인연으로 감아뒀던 기억의 실타래에서 풀어낼 이야깃거리가 어디 한둘일까마는 이마저도 선생과 상의할 수 없기에 그저 조심스럽기만 하다.

문득 30년 전의 일이 기억난다. 문화부(현 문화체육관광부)가 신설되고 초대 장관으로 부임하신 선생께서 이듬해 어느 날 필자를 급히 찾으셨다. 그곳에는 이승열 당시 국립국악원장도 배석해 있었다. 문화부 산하 국립국악원이 그해 개원 40년을 맞는데 이를 기념한 개원 ‘40년사’를 발간했으면 하셨다. 평소 누구보다도 문화를 사랑하고 역사적 사실의 기록에 앞장섰던 선생다운 말씀이었다. 그런데 문화부가 신설 조직이라 예산이 넉넉지 않아 이 중요한 문화사적 의미를 담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읊조리듯 탄식하셨다. 이는 국악이라고 하는 문화의 한 영역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 또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얹힌 묵직한 말씀으로 필자에게도 들려왔다.

그러면서 힐끔 필자의 표정을 살피시는 듯했다. 그렇게 몇 초, 다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더니 선생에게서 평소 발견하기 쉽지 않던 부드러운 음성으로 삼성출판사가 도와주기를 넌지시 요청하셨다. 학자의 당당함과 관료로서의 권위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표정의 선생과 필자의 눈이 간격의 정중앙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그 찰나가, 무조건 지원하겠다는 다짐의 계약서에 날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하여 ‘국립국악원 40년사’는 삼성출판사의 후원으로 발행할 수 있었다.

선생은 자존심이 대단히 강한 분이셨다. 선생을 가까이에서 보아 온 분이라면 다들 느꼈을 것이다. 아무리 필자를 미덥게 여기셨다고 하더라도 청탁하거나 신세 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선생의 성품으로 볼 때 절대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선생의 이 쉽지 않은 건의가 계기가 되어 국립국악원의 중요한 역사에 작게나마 삼성출판사가 함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필자에게도 큰 보람이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새삼 선생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렇듯 선생은 장관으로 봉직할 때나 그 직책을 내려놓은 후에도, 문화부에 관해서는 유독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앞장서주셨다. 문화부를 통한 선생의 이러한 문화 견인자 역할과 실천적 사례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30년이 지나 2021년 어느 날 행사차 국립국악원을 방문했을 때 국악박물관 자료실에서 국악원 자료 담당 직원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40년사’를 꺼내오더니 당시 삼성출판사의 전적인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며 잠시 30년 전의 기억을 소환해주었다. 아울러 올해가 벌써 국악원이 문을 연 지 70년이 되었다며 이 역사를 담아 ‘70년사’를 발간했는데, ‘40년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생의 문화 사랑 실천에서 비롯된 뜻깊은 회고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와의 이별이 있기 한 해 전이었기에 흐뭇했던 기억보다는 그리움이 밀려들어 허전함만이 앞서는 듯하다.

당시 고마움의 표시로 이승열 원장이 넌지시 건네준 멋진 ‘고장 북(소리북)’은 지금까지도 필자의 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다. 흥부가 박 타는 대목에 맞춰 덩달아 바빠지는 고수의 ‘소리’ 장단처럼 흥겹고도 쩌렁쩌렁했던 선생의 강연을 다시 한 번 듣고 싶어 초점 잃은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심히 서 있는 문수봉의 바위 허리뿐. 다시 옷깃 안으로 쓸쓸함이 밀려든다.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주요뉴스
기사댓글
AD
count
AD
AD
AD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