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90년대 되밟으니, 가야 할 길이 보인다[북리뷰]

  • 문화일보
  • 입력 2023-08-04 09:10
  • 업데이트 2023-08-0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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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92년 서울 종로2가 음반판매상 앞의 모습. 1990년대는 대중문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자료사진



■ 모든 현재의 시작, 1990년대
윤여일 지음│돌베개

문화·사상의 황금기였지만
경제위기 겪은 좌절의 시대

비평지 등 ‘잡지’를 매개로
젠더 갈등·사회적 불평등 등
오늘날 논쟁의 뿌리들 추적

어수선한 90년대 부표 삼아
지금을 사유하고 미래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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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을 앞두고 등장한 임홍택의 책 ‘90년대생이 온다’를 기억하는가. 전쟁은커녕 혁명도 겪은 적 없이 경제적 풍요 속에 자란 세대가 새로운 10년의 포문을 열어젖히자 온 사회가 소란스러워졌다. ‘공정에 민감하고 소비에 익숙하며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정도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90년대생이 신입사원으로, 신진작가로, 신인선수로, 젊은 기업가로 명함을 내밀 때쯤, 사람들은 90년대를 곱씹기 시작했다. 우리 기억 속 1990년대는 서태지가 등장하고 K-팝이 태동한 문화의 황금기면서 억압 없이 온갖 사상이 쟁명을 한 낭만의 시대였는가 하면, 선진국을 꿈꿨지만 경제 위기로 모든 게 무너졌던 좌절의 시대이기도 하다. 각자가 가진 기억의 단상은 다르지만 대체로 생각에 끝에선 이런 결론이 하나 도출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수선한 시대라고.

세기말을 겪어본 이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90년대생은 이질적이지만, 90년대는 익숙하다. 여러 사회 갈등의 뿌리를 좇다 보면 늘 이 시기가 나와서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 든 게 반갑다. 한국사회의 변동을 고찰해온 저자는 “90년대는 지금 시대를 규정짓는 여러 조건의 근 기원”으로 정의하고, 30년 전 과거를 통해 지금을 사유한다. 현재 한국사회가 겪는 갖가지 논쟁들의 밑그림이 90년대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미래는 오지 않았기에 알 수 없지만, 과거는 겪어봤지 않은가”라며 역사로 넣기엔 다소 애매한 지점인 90년대를 부표 삼아 우리가 어디까지 흘러왔는지를 가늠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신선하다.

산업화, 민주화 같은 역사적 지표가 존재했던 앞선 시대와 달리 명확한 조감도가 없는 90년대를 조립해 나가는 방식도 새롭다. 저자는 90년대로 진입하는 매개물로 ‘잡지’를 골랐다. 신문·뉴스·영화·사진 등 구할 수 있는 자료가 널렸는데도, 굳이 스마트폰과 유튜브의 등장으로 멸종위기를 겪는 잡지를 꺼냈다. 잡지의 ‘화양연화’(花樣年華·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가 90년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선택은 탁월하다. 이 시기 등장했다 사라진 많은 잡지 속엔 연대기적 사건의 기록을 넘어선, 당시 사건들에 관한 치열한 고민과 해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90년대에만 1000종이 넘었던 잡지 속 잡(雜)스러운 글들은 기호에 따라 읽고 버리는 정보 모음집이 아니라 당대 여러 문제가 한 곳에서 조우하는 기묘한 공론장인 셈이다.

저자는 잡지 중에서도 문학지·문화지·사상지·비평지·계간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민중·계급·해방·이성 등 거대한 담론이 지배했던 80년대를 벗어나 타자·욕망·개성·해체 등 지금도 그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작이 1990년대였다고 밝힌다. 양성평등·동성애 같은 이슈뿐 아니라 첨예한 젠더 갈등도 이 시기 시작됐다는 점을 강조하며 “90년대 말 군가산점제 논란은 젠더 갈등이 노골화된 첫 사례였을 뿐 아니라 이후 젠더 갈등이 구조화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와 같은 세대론적 인식과 갈등의 기원도 90년대에 있다. 머리를 물들이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오렌지족으로 대표되는 신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곱지 않았던 시선을 잡지에서 끄집어낸다. 저자는 “90년대를 거치며 세대는 계급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사회 변수로 자리 잡게 됐다”며 386세대가 자기 서사를 구축해 486, 586세대로 업데이트되며 장기집권하는 시작점도 90년대 신세대론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을 꼽는다.

책을 읽다 보면 드라마 ‘응답하라 1994’를 보며 ‘좋았던 그 시절’이라고 긍정하기만 했던 막연한 향수가 불편해진다. 많은 위기와 불안들이 당시로부터 연원했음을 확인해서다. 그러나 책을 덮고 90년대에서 ‘로그아웃’하기 전 이 문제적 시대가 남긴 과제를 사유해본다면 다가올 시대의 궤적은 틀어볼 수 있지 않을까. 340쪽, 1만9000원.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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