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고생 때 아버지(왼쪽 두 번째)와 함께 찍은 사진. 맨 왼쪽이 대흥사 도수 스님, 내 옆이 어머니 최미나 소설가.
■ 그립습니다 - 시인 이동주(1920∼1979)
사람들은 돌아오기 위해서도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아서도 떠난다. 그렇기 때문에 늘 바람 가득한 광야 하나를 가슴에 지니고 살아간다. 아버지 이동주 시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니 어쩌면 더 특별한 방랑벽을 평생 지니고 사신 분이다.
그렇다고 불멸의 로맨스의 일탈도 아닌, 감옥에서의 탈출도 아닌 아버지의, 아버지만의 생존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가을 노르웨이를 찾아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솔베이지의 노래를 읊조리니 아버지의 딸로 살았던 17년의 시간이 영화 필름처럼 풀려나갔다.
“서울에 보름만 있으면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어.”
아버지가 종종 하신 말씀이다. 가족이라곤 엄마와 달랑 딸 하나인 나를 두고 짧게는 열흘, 길게는 두세 달 동안 잠적을 하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우리 모녀에게 아버지를 부산과 제주도에서도, 고향인 해남에서도 봤다는 제보가 들어오기도 했다. 모교인 서라벌예대를 비롯, 전북대, 성신여대 등의 강의도 중도에 그만두고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이셨던 아버지. 당신은 수시로 부재(不在)중이셨고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을 때라도 누굴 만나게 되면 잠시 앉혀놓고 어디서 돈을 구해 오셨는지 차와 식사는 물론, 교통비까지 쥐여주셨다고 한다. 선물로 받은 그림이나 글씨도 원하는 사람에게 나눠주시고 심지어 입고 있던 옷마저도 누가 좋다고만 하면 그건 그대로 그 사람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문학에 있어서는 토씨 하나하나에도 철저하셨던 이동주 시인. 아버지는 문인을, 문학을 그토록 사랑하셨던 것이다.
소설가이자 아래로 띠동갑인 젊은 어머니에게도 존대하시고 시인과 소설가의 장르는 달랐지만 배고픈 현실보다 풍성한 문학의 길을 말씀하시던 아버지, 마흔 넘어 보신 외동딸의 이름 하나 짓는 데도 일주일을 목욕재계하고 딸이라고 부르기에도 아까워 달이라 부르셨던 내 아버지.
방랑하는 시인의 딸로서의 현실은 1년에 두세 번씩 이사를 다니고 한 학기 등록금도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하고 외로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시간이었다. 그렇다 해도 좁은 집안 가득히 쌓여 있는 책들과 부재중임에도 선후배 무관하게 찾아오시는 문인들을 보며 나는 싫어도 시인 아버지의 딸임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나는 절대로 시인이 되지 않을 것이며 집을 떠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성장했다.
사랑과 운명은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인지 나도 시인이 되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서 받아오는 상장마다 찢어버리며 어머니는 반대하셨는데 내가 저질러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유산은 한 푼도 없었지만 나는 이동주 시인의 딸이었고, 나 또한 시인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아버지와 동행하지 못한 채 시인의 길을 걷고 있는 내게 아버지는 어떤 재산보다도 문학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문인에 대한 사랑은 당신이 개척하신 ‘실명소설로 읽는 한국문학사’에도 남겨주셨다. 사랑은 늘 그리움으로 남는 법이다. 후회는 늘 늦은 것이고 그리움은 늘 아픈 것이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아버지가 그립다.
60세가 되자마자 서둘러 먼 길을 떠나신 아버지. 임종하시기 보름 전까지 어머니에게 구술해 작품을 쓰셨던 시인, 아버지에게 문학의 길은 아직 남아 있는데….
딸 이애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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