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의 마지막까지 선을 그으시던…‘화가들의 대장’[부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박서보 화백의 빈소에서 조문객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 92세 박서보 화백 별세

‘단색화’, 해외에 알린 선구자
후학 양성등 韓미술 성장판役

“2주 전에도 내년 전시 이야기
한국미술의 한 시대 막 내려”

“투병 중에도 찾아뵐 때면 늘 선을 긋고 계셨어요.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수신(修身)하는 기운이 느껴졌죠.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분이란 생각이 들어요.”

한국 현대미술에 한 획을 긋고 지난 14일 향년 92세로 별세한 거장 박서보(1931~2023) 화백의 마지막 길은 호탕했던 그의 성격답게 떠들썩했다. 김구림·서승원·이강소·이배 등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부터 평론가·기획자 등 내로라하는 미술계 인사 수백 명이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하며 저마다 그와의 추억이 가득 담긴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15일 빈소에서 만난 최재우 조현화랑 대표는 화랑 설립자인 모친 조현 씨의 기억을 빌려 “1990년대 부산에서 전시를 할 때면 정창섭, 윤형근, 김창열, 이강소 같은 기라성 같은 작가들을 이끌고 오셔서 작업을 하고 미술 비평도 하던, 말 그대로 대장이었다”고 말했다. 조현화랑은 1992년 첫 개인전에서 시작해 14번에 걸쳐 가장 많은 고인의 전시를 연 화랑으로, 올해도 신작을 포함한 개인전을 진행할 만큼 고인과의 인연이 깊다. 최 대표는 “2주 전에도 부산에 오셔서 새로운 작품과 내년 전시까지도 얘기했던 터라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망하다”면서 “한국미술의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화가뿐 아니라 모교 홍익대 미대 학장을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는 등 한국미술의 성장판 역할을 했던 교육자이자 미술계 어른으로서의 면모도 회자됐다. 구상조각 거장으로 홍익대 교수를 지낸 김영원 조각가는 “후배들을 아우르고 더 나은 길로 인도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미술치료사인 박 화백의 딸 승숙 씨는 “아버지는 한국 현대미술이 해외에 알려지기 위해 연구·평론·이론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뜻을 내비치셨다”고 했고, 주민영 조현화랑 이사는 “고인은 단순히 작품세계를 완성하는 것을 넘어 국내외 화랑들에 한국에 이런 좋은 작가들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렸다”고 했다. 이날 오후 빈소를 찾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019년 프랑스 파리 페로탕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찾은 기억이 있다. 여러 행사에서 마주칠 때마다 늘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면서 “서로 분야는 달라도 예술적 교감이 통했고 배우처럼 멋쟁이였던 선생님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고인은 한국 추상미술 ‘단색화’를 해외 미술계가 주목하는 장르로 만든 선구자다. 선을 긋는 행위를 되풀이하는 ‘묘법(escrite)’ 연작으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한 고인의 작품마다 묵묵히 수행하는 한국적 정신이 담겼다는 평가가 나왔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과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등 유수의 해외 미술관들이 고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1976년 작 묘법 작품인 ‘№ 37-75-76’은 지난 5일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60만 달러(약 35억 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올해 2월 폐암 판정 소식을 알린 고인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아직 그리고 싶은 것들이 남았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 투병 중에도 작업 의지를 불태워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명숙 씨를 비롯해 2남 1녀가 있다. 발인은 오는 17일 오전 7시, 장지는 분당 메모리얼 파크다.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