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 해치는 ‘국가면제 배제’ 리스크[포럼]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지난 23일 서울고법에서 내려진 일본 군대위안부 피해배상 판결은 우리 사회에 과제를 남긴 아쉬운 결정이다.

제1차 위안부 소송은 2013년 8월에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1차 소송에서 1심 재판부는 2021년 1월 “일본의 불법행위에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며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국가면제란, 모든 주권국가는 다른 나라 법원에서 재판받지 않는다는 국제관습법이다. 일본이 소송에 무대응함으로써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그 후 제2차 위안부 소송은 2016년 12월에 제기됐다. 1심 재판부에서는 지난 2021년 4월 ‘국가면제’ 법리를 들어 피해자들의 청구를 각하했다. 그런데 지난 23일 열린 2심 재판부는,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국제법의 소수설을 받아들이면서 판결했다.

사법부의 각기 다른 판단에 따라 한일 관계가 요동치는 게 문제다. 법원이 우리나라 외교의 방향에 찬물을 끼얹는 판결을 한 것이다. 초점이 된 국가면제에 대한 해석은 사법부 내에서조차 일치된 견해가 없었다. 게다가, 피해자들이 승소했다 하더라도 배상의 추심 과정에서 국가면제 해석은 또다시 정반대로 나타났다. 1차 위안부 소송에서 승소한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 재산 압류에 나섰지만, 2021년 3월 같은 법원 재판부는 국가면제 때문에 소송 비용을 일본 정부로부터 추심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반면, 같은 법원 다른 재판부는 배상금 추심 소송에서 재산 명시를 명령했다. 이런 사법부의 불일치로 인해 대일 외교정책은 혼란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법 리스크로 인해 한일 관계는 예측이 불가능하며 일본의 불신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된 게 분명하다. 다시 갈등이 되풀이될 것이란 우려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번 판결은 법원이 피해자의 입장을 중시해서 내린 결정이지만, 국가 전체의 국익이라는 차원에서도 고려해야 할 중대 사안이었다.

사법부의 판단은 3권 분립이라는 정신에 따라 존중돼야 한다. 피해자의 구제에 정부도 힘을 합쳐야 한다. 하지만 복합위기의 국제관계 속에서 외교의 중요성도 망각해선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으로 한일 관계는 지난날 자존심 대결에서 벗어나 다시 가치를 함께 하는 우호적 관계로 거듭날 수 있었다. 한일 관계 개선은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일삼고, 미·중 전략 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에서 외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윤 대통령의 고심 결과였다.

한일 관계의 복원으로 우리나라 외교는 국제사회의 자유민주주의 질서 유지에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어렵게 만들어낸 한일 관계 개선을 이번 판결로 인해 한일 양국이 갈등하는 상황으로 또다시 퇴행시켜서는 안 된다. 특히, 미·중 전략 경쟁이 첨예한 상황에서 한일 관계, 나아가 한미일 협력은 우리의 미래에 사활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우리의 국익을 생각하는 전략 외교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번 판결로 윤 정부는 대일 외교에서 일관성을 가지면서 국내 피해자 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됐다. 이제 우리도 감정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전략적인 자세로 정부가 대일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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