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똑같은 세상이니까… ‘신발 끈’ 묶고 다시 나아가리[주철환의 음악동네]

  • 문화일보
  • 입력 2024-01-22 09:07
  • 업데이트 2024-01-22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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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철환의 음악동네 - 장민호 ‘신발 끈’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자.’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는 군가나 응원가가 아니다. 무기나 깃발 대신 꽃밭이 펼쳐지는 서정 가요다. ‘그곳 모란이 활짝 핀 곳에 영랑이 숨 쉬고 있네.’ 이 노래의 제목은 ‘영랑과 강진’(원곡 김종률, 정권수, 박미희)이다. 초창기 대학가요제(1979)가 낳은 명곡 중 하나다.

음반 표지에 실린 청년의 얼굴들은 모란을 닮았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음악은 우리를 만나게 한다. 노래는 창고에 가둬놓을 수 없다. 부르면 바로 달려 나와 품에 안기기 때문이다. 노래 속의 시인(김영랑, 1903∼1950)은 떠나도 강진에 봄은 해마다 오고 모란은 계절마다 피어 약속이나 한 듯 자기를 기다려준 시인을 추념한다.

‘올봄엔 꼭 가야지.’ 그러면서 봄날을 숱하게 보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백설희 ‘봄날은 간다’)가 무색하던 차에 지난달 (2023년 12월) 강진에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실학박물관이 주관하는 청년 모임에서 강의 요청을 한 거다. 그들이 제안한 제목은 ‘K-컬처와 실학’. 남도 기행은 사뭇 설레는데 과연 노래채집가는 거기서 무슨 얘길 하지?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적어도 이런 소린 안 들어야 할 텐데.

박물관은 산 자와 죽은 자가 대화를 나누는 곳이다. 강진엔 영랑 이전에 다산(정약용, 1762∼1836)이 머물렀다. 그의 학문이 실학이라면 K-팝은 실용음악이다. 나는 공통으로 들어 있는 실(實)에 주목한다. 좋은 결실(結實)을 보려면 사실(Fact)과 현실(Reality) 속에서 진실(Truth)을 추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태도가 성실(誠實)이다. 하지만 성실에 점 하나 잘못 찍으면 정실(情實·사사로운 정이나 관계에 이끌리는 일)이 된다. 경계할 일이다.

열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차창에 비친 나를 보았다. 실(實)없이 웃다가 혼난 기억이 난다. “뭐가 그렇게 좋아?” 회의실에서 다들 심각한 표정인데 나만 해맑게(?) 웃으니 부장님이 야단치신 거다. “잘될 것 같아서요.” “무슨 근거로?” 그땐 답변을 못 했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때로는 근거 없는 낙관이 근거를 만들어주던데요.”

몇 분 후에 나는 내려야 한다. 짐을 챙기는데 옆자리 손님의 휴대전화에서 장민호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해가 없는 하늘 있을까, 달이 없는 하늘 있을까, 누구나 똑같은 세상이니까, 한숨 푸념은 이제 그만.’ 노래 제목이 특이하다. 갓끈도 아니고 가방끈도 아니고 ‘신발 끈’이다. 출세하는 데 필요한 끈이 학연·지연·혈연이고, 가방끈이 길어야만 인정받는 사회라면 원망과 시샘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노래가 이어진다. ‘씨앗 뿌려 하루 만에 꽃이 피더냐, 꽃망울 하나에 두 꽃이 피더냐, 가는 길 험해도 나는 또 걸어간다.’ 만약 다산의 길이 한숨과 푸념으로 이어졌다면 그 실학은 실망(失望)의 학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한 적이 있다. 그가 유배당하지 않았어도 이런 엄청난 저작물을 생산해낼 수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역시 ‘최고의 복은 전화위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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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버리라고 할 때 ‘근거는 실력(實力) 실행(實行)으로 보여줄게’라고 속으로 다짐하자. ‘어느 날 웃었다 또다시 운다 해도, 인생길에 신발 끈 풀려 주저앉아도, 다시 묶고 일어나 떠나야지.’ 실학도, 실용음악도 이름값을 하려면 실생활에 활력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 잇달아 실패하던 장민호가 화가 나서 신발을 차버렸다면 오늘 이 노래는 다른 가수가 녹음했을 거다. 차에서 내리니 바람이 차다. 신발 끈 다시 동여매니 강진으로 가는 길이 가뿐가뿐하다. 노래가 착착 입에 감긴다. ‘바람 없는 들판 있을까, 파도 없는 바다 있을까, 누구나 똑같은 세상이니까.’(장민호 ‘신발 끈’)

작가·프로듀서 노래채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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