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말보다 행동으로… 병치레조차 홀로 조용히 하신 ‘묵직한 사랑’[그립습니다]

  • 문화일보
  • 입력 2024-01-31 09:28
  • 업데이트 2024-01-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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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1991년 7월 아내의 고모 생신 때 경기 용인시 고모댁 텃밭에서 장인, 장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



■ 그립습니다 - 장인 이호원(1922~2006)

도무지 말이 없으시다. 아내도 장인어른을 닮아 그런지 평상시에 별로 말이 없다. 처갓집에 가서도 장인어른과 대화를 한 기억이 거의 없다. 어쩌다 하룻밤을 자더라도 저녁에 일찍 주무시고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이미 논에 가 계신다. 벼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더니 우리 장인어른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언젠가 추석을 맞이해 처갓집에 갔을 때 예기치 못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에 벼가 모두 쓰러졌다. 장인어른 혼자서 다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을 뻔히 아는데 논으로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랑을 나누어서 벼를 세우다 보니 대화의 거리로서는 제법 떨어지고 말았다. 이미 싹이 튼 벼도 군데군데 보이니 안타까운 마음에 쉬지 않고 더욱 열심히 벼를 세워나갔다. 그런데 집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논이라 마실 물이 없다. 미리 물을 챙겨갔어야 했는데 농사일을 모르니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장인어른은 옆구리에 꿰차고 간 막걸리를 중간중간 드시는데 나는 술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일절 ‘한 모금 마셔보라!’는 소리조차 안 하신다. 그때는 막걸리라도 마셔야 할 정도로 목이 정말로 타들어 갔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한 모금 마시겠다는 용기가 그때는 올라오지도 않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는 아내 보고 ‘물 좀 갖고 오지 그랬냐?’고 괜한 짜증만 내고 말았다.

한번은 슬그머니 주머니에 돈봉투를 넣어드렸다. ‘이게 뭐냐?’고 묻지도 않고 더 깊숙이 봉투를 밀어 넣으신다. 그때 알았다. 자식들의 용돈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늘 장모님께만 드리고 일찍이 깨닫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손주들의 귀여운 모습에는 잔잔한 미소로 맞이해주셨지만 살가운 손주들 안아주기도 거의 하지 않으신 것 같다. 그래도 자식과 사위, 그리고 손주 사랑만은 잔잔하지만 충분히 흘러넘치셨다. 장인어른의 부지런함으로 밭두렁에 베어 놓아서 말라버린 풀을 태우다가 그만 마을에 큰불로 번질 뻔한 적이 있었다. 경찰서에 불려 가고 호된 괴로움을 겪으면서도 일절 말이 없으셨다. 그때 멀리서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껏 머릿속을 짓누른다.

모든 것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것 같다. 시골에 도착해 밭일 나가신 장인어른을 조금이라도 빨리 뵙고자 아이들과 밭으로 차를 타고 서둘러 이동하다가 거의 다 가서 그만 마을 길 도랑에 차를 빠트리고 말았다. 장인어른이 헐레벌떡 밭에서 내려오시더니 마을 청년의 트랙터를 얼른 부르신다. 시골이니 누구 할 것 없이 부탁만 하면 선뜻 나서는 인심이기도 했지만 장인어른의 동네 터줏대감으로서의 든든하고도 막강한 입김이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는 차가 꺼내지자 이내 밭으로 슬그머니 가버리신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일이 더 익숙하고 일하는 것이 마치 취미인 양 참 부지런도 하셨다.

병치레조차 슬그머니 하셨다. 언제 병에 걸렸는지도 모른 채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지만 전혀 아픈 기색조차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는 얼마 안 있어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날마다 발걸음 소리를 들려주던 논에도 아무 기약 없이, 그대로 두신 채 말이다. 입관하던 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물바다가 되었다. 깊은 정감이 없었던 것 같아도 장인어른의 말없이 전해진 묵직한 사랑에 그만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장인어른 형제의 생일잔치에 모시 적삼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셨기에 얼른 셔터를 눌렀다. 그때 곱게 차려입은 채로 찍은 장인, 장모님의 사진이 유일하게 남은 두 분의 모습이 되었다. 아내에게는 물론 처형과 처제에게도 두고두고 칭찬받는 멋진 작품 사진이다. 장인어른 너무나 그립습니다.

사위 정희순(이랜드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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