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보관과 폐기[살며 생각하며]

  • 문화일보
  • 입력 2024-04-0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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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책은 사회 역량 담긴 문화 산물
그 안 지식·정보로만 평가 못해
장서 수 많아질수록 공간 부족

도서관서 폐기 자연스러운 현상
책은 고유한 가치와 사연 간직
폐기 땐 기증 등 심사숙고해야


얼마 전에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 영인본을 구하였다. 고려 충렬왕 13년(1287)에 지은 고려와 중국의 역사를 시로 쓴 책이다.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고려 말 조선 초의 중간본이 국가유산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역사서이다.

일제강점기에 1417년에 간행된 중간본을 옛 책답게 영인하였는데, 영인본이지만 구하기 힘든 책이라 오래도록 가지고 싶었다. 우연히 그 책을 입수하여 펼쳐보니 모 대학 장서인이 찍혀 있었다. 그 대학에서 폐기한 책이 헌책방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다. 책이 깨끗한 것을 보면 이용자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폐기된 것으로 보였다. 책을 얻어서 기쁘기는 하지만 이렇게 귀중한 책을 대학 도서관에서 내쳤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도서관에 소장된 책이 폐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신청자가 거의 없거나 오래되어 해지고 복본이 있는 경우 등 저마다 기준을 세워 보관하거나 폐기한다. 이승휴의 ‘제왕운기’는 아마도 읽은 독자가 매우 드문 탓에 폐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이유로 내 서가에 들어온 책이 ‘제왕운기’ 말고도 십여 책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폐기하는 추세가 더 가팔라지는 모양새이다. 한 해 전에 어느 대학 도서관에서 대규모로 장서를 폐기하려다가 심한 반대에 부닥쳐 계획대로 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제왕운기’ 같은 귀중한 책이 헌책방에 대거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책을 폐기하려는 측과 반대하는 측 모두 저마다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 도서관에서는 장서의 수량이 많아질수록 공간이 부족해지고, 점차로 디지털 자료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고 보관하는 자료의 주류가 되므로 그에 맞춰 장서 수를 조절하려고 한다. 그에 대한 반응이 학문의 분야에 따라 극심한 차이가 있다. 크게 보아 인문사회계, 그중에서도 인문계 종사자는 서적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높고, 이공계 종사자는 디지털 자료 의존도가 극대화되어 서적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히 낮다.

이용하는 사람이 적은 서적은 공간만 차지할 뿐이니 차라리 폐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점차로 더 많아지고 더 큰 힘을 가진 듯하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디지털 자료 위주로 자료 구입비를 사용하고 여유가 생긴 공간을 열람실이나 세미나 공간 등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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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규모가 큰 대학의 장서는 대학뿐만 아니라 그 대학이 위치한 지역의 학문적 역량을 보여주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중요한 자산의 하나이다. 서가에 꽂혀 있는 장서의 품질과 가치만 보아도 문화와 학문의 수준과 역량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할 정도이다. 이용하는 사람이 적고 공간을 차지한다고 해서 한 권 한 권 가치를 평가하지 않고 폐기할 수 없는 유형의 자산이다. 게다가 책은 그 안에 담긴 지식과 정보만으로 그 가치를 다 평가할 수 없다. 한 사회의 역량이 들어간 종합적 문화 산물이므로 책이 지닌 여러 가치를 존중하여 판단할 일이다.

장서의 보관과 처리를 두고 발생하는 고민은 특정 도서관만이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많은 도서관이 한편으로는 장서의 부족을 고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장서가 너무 많음을 고민한다. 디지털 자료 위주로 구매하고 서비스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손쉬운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소규모 도서관이 아닌 대규모 도서관에서는 책이 지닌 다양한 가치를 심사숙고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하여야 한다.

장서의 문제는 도서관만의 고민이 아니다. 장서를 많이 가진 개인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마찬가지 고민을 안고 있다. 특히, 정년이 가까워진 교수에게는 곧 닥쳐올 문제이다. 정년을 앞두고서 연구실을 채우고 있는 책을 어떻게 보관할 것인지는 큰 고민 거리다. 전문 연구자의 장서는 각 분야에서 구하기 힘든 귀중한 도서가 끼어 있다. 아무렇게나 흩어 버릴 수 없는 고유한 가치와 사연을 저마다 간직하고 있다.

나이가 비슷한 또래 교수들끼리 만나면 때때로 저마다 장서 처리 문제를 공유하며 해결법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연구실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고, 장서를 학생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자택에 보관할 수 있을 정도로 장서의 수를 줄이기도 하고, 장서가 필요한 다양한 도서관이나 연구기관 등에 기증하기도 한다. 또, 헌책방에 팔아넘기거나 무상으로 보내기도 한다. 어떤 방법이든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

모양이 그다지 좋지 않은 것이 마지막 방법이다.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요사이 생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꼭 보고 싶은데도 절판(絶版)되어 구하기 힘든 책을 여러 번 헌책방에서 사서 본 일이 있다. 여러 대학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없는 책을 구해서 보기도 했다. 어떤 책에는 장서인(印)이나 서명이 적혀 있어서 누가 보던 책인 줄 알아본 적도 있다. ‘제왕운기’도 그런 책 가운데 하나이다. 이처럼 이전 책 소장자에게서 다음 소장자로 옮겨가는 것도 제법 괜찮은 책의 순환이다.

다만, 개인 장서가가 아닌 공공 도서관과 대학 도서관에서는 책을 보관하고 폐기할 때 책의 가치를 충분히 평가하여, 가치 있는 책은 버리고 가치 없는 책은 보관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책을 잘 아는 전문가의 안목이 필요하다. 책은 공공의 물건이다. 현재 누가 소유하고 있든 나중에는 꼭 필요로 하는 독자의 손으로 책은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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