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부터 소까지… 日의 ‘식량식민지 조선’ 개조 작업[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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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조선
임채성 지음│임경택 옮김│돌베개

벼농사 근대화로 생산 늘었지만
양질의 조선 쌀, 일본으로 유출
조선인 쌀 소비량 오히려 줄어
‘건강한 조선 소’도 모두 끌려가

사과·명란젓은 수출 긍정 효과
강점기가 푸드시스템 뒤흔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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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성 일본 릿쿄대 교수의 ‘음식 조선’에 따르면, 한일 강제 병합과 일제강점은 조선의 전통적 푸드 시스템을 뿌리부터 뒤흔든 분기점이다. 이때부터 일본제국의 푸드 시스템에 흡수·통합되어 운영되면서 재래의 푸드 시스템에 본격적인 구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단선적이지 않았다. 식민지근대화론이 말하듯 일제가 근대화의 키다리 아저씨로 등장하는 수혜 과정도 아니고, 민족 경제론에서 주장하듯 일제의 일방적 수탈 과정도 아니었다. 저자는 ‘식료 제국’ 개념을 빌려 식민지 조선을 둘러싼 먹거리의 생산, 유통, 소비 과정의 변화를 정교하게 그려낸다.

식료 제국이란, 지리학자 에번 프레이저와 앤드루 리마스가 제창한 것으로, 고대 이집트에서 빅토리아 영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국은 식료의 생산, 보존과 수송, 거래 구조 등을 중심으로 지탱되었다는 말이다. 제국 내외에서 생산되고 축적된 식량이 적절한 수송 수단과 시장 거래 등을 통해 적시에 제국 전체로 배분되지 않으면, 즉 모든 제국은 식료 제국이 되지 않으면 결국 몰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국 내 푸드 시스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피는 것은 그 제국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는 핵심 경로다.

다른 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제국도 푸드 시스템의 안정적 유지를 핵심 과제로 삼았고, 조선 역시 그 한 부분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바꾸어 나갔다. 자본주의를 도입하고 시장경제를 활성화하는 정책이 잇따라 시행되면서 과거의 식료 사업이 재편되고 새로운 식료 산업이 이전되는 등 일제강점기 조선의 푸드 시스템은 빠르게 근대화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제국 전체의 푸드 시스템이 조선 식료 산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근대성과 민족성과 식민성이 뒤섞인, 한국 음식 문화의 키메라적 풍경을 드러낸다.

조선 사회는 전반적으로 자급자족 중심, 즉 식료 교환과 유통이 활발하지 않은 소극적 분배 사회에 가까웠다. 그러나 강점 이후, 시장경제에 포섭되면서 조선의 음식 자원은 조선 내부뿐 아니라 일본제국 영토 전체에 팔리는 식료 상품으로 변화했다. 조선인은 전혀 수동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새롭게 등장한 거대 시장에서 기회를 잡으려고 대규모 공장과 과수원을 조성해서 값싼 식료품을 생산해 수출하는 등 주체적·역동적으로 대응했다.

일본 식료 제국은 근대 시장 원리에 따라 푸드 시스템을 운영했으나, 그 중심은 항상 일본 내지였다. 조선 쌀의 생산과 소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산미 증식 계획이 시행되고, 일본 지주가 농장주로 조선에 진출하면서 조선 내에서 벼농사의 일본화가 실현됐다. 그러나 쌀 생산량 증가는 조선인 복리에 이바지하지 못했다. 조선 내 쌀 소비를 억제하고, 대체 곡물(보리, 콩, 조, 감자, 고구마 등) 소비를 촉진하는 등 수출을 중심으로 소비가 이루어진 까닭이다. 1930년대까지 조선 내 쌀 소비량은 오히려 떨어졌고, 조선인의 1인당 소비 열량 저하도 꾸준했다. 그 결과,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92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 약 1∼1.5㎝나 작아졌다.

소도 비슷한 비극을 겪었다. 1910년엔 조선 소의 사육두수가 일본보다 많았다. 이후, 대규모 수출과 함께 방역과 검역이 체계화되면서 전염병이 줄어들어 ‘건강한 조선 소’가 생산되는 등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조선 소의 열등화 과정을 불렀다. 질 좋은 소들이 모두 일본으로 빠져나가자 조선 소의 체격이 줄어들고, 두수 증가도 정체되면서 마침내 일본 소에 역전당한 것이다.

사과의 경우처럼, 시장의 힘을 빌린 반격도 있었다. 강점 이후, 사과는 판매와 수출을 목적으로 홍옥, 국광, 왜금 등 맛 좋고 수확량 높은 미국 품종을 들여와 대규모 농장 재배를 시작했다. 사과나무 숫자는 1912년 약 50만 그루에서 1940년 약 350만 그루로 7배가량으로 증가했고, 생산량도 늘어났다. 수입된 조선 사과는 경쟁력을 갖추면서 일본, 대만, 만주,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일본 내지에선 아오모리 사과와 경합하면서 ‘사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함경도 지역 특산품이었던 명란젓은 일본에 진출해 아예 일본인의 입맛을 바꾸었다. 일본에선 명태를 주로 다른 잡어와 함께 갈아 가마보코(어묵)로 소비했다. 그러나 식염과 고춧가루로 가공한 명란젓이 조선 거주 일본인을 통해 전해져 본토에서도 인기를 끌자, 가공 공장이 세워져서 대량 판매됐다. 조선의 맛이 제국의 맛이 된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엄밀성과 입체성이다. 이전의 근대 초기 음식 관련 책들이 대부분 에피소드 중심의 나열식 전개에 그친다면, 이 책은 방대한 자료와 학술 연구를 바탕 삼아 일본제국의 푸드 시스템 속에서 음식 조선의 모습을 심도 있게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유, 사과, 소주, 맥주 등 외국 식료가 조선에 널리 퍼지기도 하고, 명란젓, 홍삼 등 조선 식료가 해외 음식 풍경에 자리 잡는 등 일본제국에 의한 ‘식’의 재편이 어떻게 한일 양국의 음식 문화를 공진화시켰는지, 담배, 홍삼, 주류 등 총독부 전매 상품을 통해 재정을 마련했던 일제 관행이 해방 이후 한국에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근대 이후 우리 음식 경제와 식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사유를 더해줄 책이다. 480쪽, 3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