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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습니다 - 나의 어머니 안형순(1932~2008) <하>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다섯 살 위의 언니가 고사리손으로 밥을 지어 돌산에서 일하는 엄마 도시락 심부름을 보낼 때면 중간쯤에서 밥 사이에 박힌 감자를 쏙 빼 먹곤 했었다. 꽁보리밥에 푹푹 뚫린 감자 자리를 보던 엄마는 그 나머지마저도 입에 넣어주시며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느 따뜻한 봄날, 딸기가 먹고 싶다는 말씀에 가장 크고 좋은 것으로 사 들고 가니 모처럼 또렷한 정신이 되어 머리도 손수 감고 손발톱도 깎고 계셨다. 그 모습이 너무도 생소하면서도 기분 좋은 나머지 딸들이 서로 한마디씩 농담 삼아 주고받았다. 우리 엄마가 이제야 치매 끝 제정신이 돌아오나 보다. 벽에 무슨 칠할 때까지 제발 오래오래만 사시라고….
서로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그리 말하면서도 정말 그 지경까지 오래 사신다면 어느 자식이 앞장서 그 수발을 감당할지는 솔직히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다 같이 모여 잠시나마 모처럼 화기애애했던 그 반나절 시간이 죽음의 서막은 아니었을까. 그날 그 순간이 살아생전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돌아서 나온 얼마 후, 들려온 엄마 소식은 참담하고 서글프고 가엾고 한마디로 길지 않은 인생 자체가 불쌍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창문에 바람이 들어온다고 겨우내 걸쳐두었던 주황색 연꽃무늬 두꺼운 담요는 한쪽이 툭 떨어진 상태였고 오리털인지 닭털인지 베개 속을 밤새 혼자 쥐어뜯으며 얼마나 괴로워하셨을지 방 안엔 온통 흰털이 폴폴 날아다니며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평생을 안 해 본 일 없이 자식들 뒷바라지에 고생만 하다 혼자 쓸쓸히 먼 길 소풍 떠나신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유품 정리를 하느라 모인 자리에서 또 한 번 자매들의 대성통곡이 이어졌다. 유품이랄 것도 없는 낡은 옷가지며 아주 잠깐 좋았던 시절에 장만해 좋은 날에나 뽐내고 아껴 입었을 듯한 비로드 한복 몇 벌이 전부였다. 깍두기 모양으로 납작하게 접은 만 원짜리 한 장을 스웨터 주머니에서 발견하고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눈물이 소리 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신문지에 돌돌 말아 장롱 깊숙이 감추어 놓은 들기름 한 병에는 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그깟 들기름 한 병이 뭐라고 아끼느라 드시지도 못하고, 감추지나 말던가. 세상 등진 뒤에야 나타난 것에 화가 치밀었다.
떠난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슬픔은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라고 했던가. “살아생전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볼걸…”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각자 살기 바쁘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소중한 걸 다 놓쳐버리고 지나간 후에야 깨닫는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30년 차이 나는 그때 엄마 나이가 되어서야 차분하게 지난 시간을 되돌리며 새삼 떠오르는 모든 일들이 그립고 미안하고 고맙다는 마음만 한가득. 더불어 평생 말로도, 글로도 해보지 못했던 한마디. 사랑합니다. 내 어머니!
49재 땐가 엄마 무덤가에 맴돌던 하얀 나비를 보며 우리 엄마가 나비가 되어 우리 곁에 오셨나 보다 생각했던 것처럼 고생도 아픔도 없는 그곳에서 훨훨 자유롭고 평화롭게 지내시길 소망합니다!
딸 조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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