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 1·2세대’의 고백… “유치원때부터 입시 압박, 공부 흥미 잃고 번아웃”

■ 사교육 양극화의 단면 : 영어유치원 4만명 시대

“초등 고학년 된뒤 이점 사라져
경쟁 탓에 친구도 잘 못사귀어”

서울 강동구에 거주하는 유모(29) 씨는 25년 전 영어유치원을 다닌 ‘영유 1세대’다. ‘글로벌 리더’가 되려면 어렸을 때부터 영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 대치동에 거주하던 부모님의 교육 철학이었다. 유 씨는 영어유치원을 졸업한 뒤 국제초에 입학했고, 초등학교 3학년 시절 1년간 호주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외국에 떨어져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곳에 놓인 경험,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은 유 씨를 위축시켰다. 계속돼온 공부 압박은 삶의 흥미를 잃게 했다.

결국 유 씨는 고등학교 때 번아웃, 우울증을 겪었고 번번이 수능에 낙방한 뒤 25세 때 한 대학에 합격했다. 원하던 대학은 아니지만 26세에야 늦깎이 대학생이 된 유 씨는 이제야 자신의 행복을 찾았다고 말했다.

유 씨는 20일 “영어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됐던 입시,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겪었던 해외, 그 이후 그 어떤 추억 없이 오로지 공부와 경쟁, 입시로만 가득 찼던 내 삶에는 남는 게 없었다”며 “이번에 대학에서 과를 선택하고 인턴을 하는 등 인생 첫 나의 선택이 이뤄져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가 다니던 S 영어유치원은 현재 전국에 50개가 넘는 체인점을 보유한 유명 영어유치원이 됐다. 유 씨는 “지금 영어유치원은 그때보다 더 경쟁이 심하고 공부량도 많다고 들었다”며 “부디 아이들이 나처럼 스트레스받지 않고 아이답게 뛰어놀고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 ‘영유 2세대’ A(19) 씨는 영어유치원이 입시에 도움이 된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전했다. A 씨는 “공부에 유리하다는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일 뿐 영어를 문법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는 입시에서는 오히려 영어를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것이 한국 교육 방식과 맞지 않아 더 큰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경쟁을 하다 보니 같이 노는 친구들도 친구라고 느끼지 못하고, ‘공부할 때는 쟤보다 잘해야 돼’라는 생각이 대학생이 된 지금도 머리에 가득 차 깊은 인간관계를 맺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반면 영어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학생들은 평생 박탈감과 부러움을 느껴왔다고 말했다. 직장인 김진혜(28) 씨는 “자격증이나 영어 관련 학점은 내가 더 좋은데도 회사 동기가 영유 출신이라며 발음이 원어민 같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는 공교육만 정직하게 받은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초등학교를 넘어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 공부를 하며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옆에서 영어를 술술 읽어나가고 ‘부자연스럽다’며 정답을 골라내는 영유 출신 친구들을 보며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조율 기자 joyul@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