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총리’ 헌법적 권한 보장해야 한다[시평]

고상두 연세대 명예교수

길 잃은 대통령제 보완 불가피
무탈하게 임종한 대통령 2명뿐
당파성 모순이 불안정의 근원

佛은 내각제에 대통령제 가미
그 반대인 韓은 책임총리 중요
제청권 살려 위헌 통치 막아야

우리는 민주화를 책이 아닌 몸으로 깨달으며, 4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를 이뤘다.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짧은 임기 때문에 국정 운영의 지속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지만, 국민은 양대 정당에 10년씩 집권의 기회를 줌으로써 권력의 단명성을 슬기롭게 극복했다. 노태우-김영삼 정부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권력의 안정성과 변화를 동시에 보장하는 독특한 10년 주기 전통이 생겨났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탄생한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9년 만에 조기 종식되고, 문재인 정부가 5년 만에 마감하면서 권력의 균형추가 흔들리더니, 급기야 윤석열 정부에서 길을 잃었다. 한국의 대통령은 강하지만 불행하다. 대통령의 운명은 망명·축출·피살·투옥·자살·탄핵으로 얼룩졌고, 무탈하게 임종한 대통령은 2명뿐이다. 불행한 과거사의 배경에는 도덕 정치가 있다.

조선 시대 27명의 국왕 가운데 상당수가 권좌에서 중도 하차하거나 의문사했다. 유교 철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격상시킨 조선에서는 국왕과 백성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보았기 때문에 부모의 심정으로 백성을 돌보지 않는 국왕을 쫓아내는 역성(易姓)혁명론이 뿌리내렸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출발점은 세월호 침몰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시간에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느냐는 국민적 분노였다. 노무현·문재인·윤석열 대통령의 부인은 여론의 공격을 받았다. 국가를 거대 가정으로 보는 유교 정치사상은 가족도 못 다스리는 사람은 국가지도자 자격이 없다고 본다.

대통령이 불행한 더 큰 이유는 막강한 권력 때문이다. 유럽의 입헌군주제가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것은 국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가 더 이상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해야 한다.

의원내각제에서 국가원수는 세습 군주이거나 간선 대통령이고, 총리는 행정부의 수반이다. 국민이 선출한 다수당의 대표가 정부를 책임지고, 국왕이나 대통령은 총리에게 쓴소리하는 국민의 대변자다. 유럽 정치를 가정에 비유하면 대통령은 권위 있는 할아버지, 총리는 실권을 가진 아버지다.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이 국가원수인 동시에 행정부 수반이라는 이중권력을 가진다. 이러한 겸직성 때문에 한편으로는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적 중립을 요구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 운영을 위해 여당과 긴밀히 협의하는 당파성 모순에 빠진다.

대통령제의 대안으로 의원내각제가 제시되는 것은 대통령제 국가 중에서 민주주의가 공고한 나라는 미국·한국·대만(총통)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원내각제의 단점은 정치 불안정이다.

프랑스는 정치적 토론과 투쟁이 격렬하다. 제2차 대전 후 수립된 제4공화국 정부의 평균 수명은 6개월이었다. 1958년 샤를 드골은 유럽에서 주류인 의원내각제에 대통령제를 가미한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그 덕분에 프랑스 민주주의는 끈질긴 안정성을 갖게 됐다. 최근 프랑스 정부가 붕괴했는데, 1962년 조르주 퐁피두 총리의 불신임 이후 62년 만이다. 더 놀라운 점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2기 임기가 시작된 2022년부터 야당이 불신임안을 28회 발의했고 내각은 매월 1번꼴의 불신임 공세를 2년 이상 버텨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가 의원내각제에 대통령제를 가미했다면, 대한민국헌법은 대통령제에 의원내각제 요소를 가미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책임총리 조항이다. 총리는 행정 각부의 통할권을 가지며, 자신과 함께 일할 국무위원 제청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역대 대통령은 장관 인사권을 남용했다. 앞으로 더는 이러한 위헌적 통치를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도약을 통해 발전하며, 관행을 깨야 민주주의가 한 계단 올라간다.

우리나라 정치에서 대통령이 한 번씩 걸러 주기적으로 탄핵 되는 전통이 생겼다. 한국 대통령은 순수한 대통령제를 채택한 미국의 대통령보다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이 불행한 운명을 맞는 것은 권력이 집중되면 책임도 집중되기 때문이다. 분권적 책임총리제라는 헌법 정신을 구현해야만 역동적인 동시에 안정적인 K-민주주의 전통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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