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들의 친절에도… 전쟁 트라우마는 극복되지 않았다[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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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절한 분을 찾습니다
줄리안 보저 지음│김재성 옮김│뮤진트리

‘가디언’에서 세계문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아버지 로베르트 보거(오스트리아식 발음)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말다툼 후 사라져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러나 아버지의 침울한 성정과 끊이지 않던 외도를 지적한 어머니의 말은 늘 반복되던 것이기에 진정 자살의 원인으로 납득되진 않았다. 부음을 전하던 저자는 아버지의 유년시절 위탁모 낸시로부터 아무도 모르고 있던 아버지의 아명이 ‘보비’였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리고 낸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덧붙인다. “로베르트는 나치의 마지막 희생자였어. 놈들에게 결국 당한 거야.”

“훌륭한 빈 가문 출신의 총명한 11세 남자아이”(로베르트 보거). “아이들을 무척 좋아하고 바느질을 잘하며 가사를 거들 수 있는 교양 있는 유대인 여자아이”(알리스 헤스). “어느 박애주의자께서 재능 많은 여자아이를 거두어주시기를”(게르트루드 랑거).

보거가 세상을 떠나고 3개월이 지나 저자는 결국 자신이 모르던 아버지를 직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하게 된 83년 전, 1938년 8월 3일자 ‘맨체스터 가디언’지 광고란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아이들의 이름을 찾아낸다. 유대계 오스트리아인들은 나치가 빈을 점령하자 그들의 어린 자녀라도 탈출시키려 안전한 가정을 수소문했던 것이다.

수일간 광고란에 실린 여든 명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칭찬으로 꾸며졌다. 칭찬글은 영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던 그의 부모들이 사전을 펼쳐 찾아낸 피눈물 나는 호소였다. 저자는 빈을 탈출한 이들의 삶을 찾아 이스라엘, 프랑스, 미국, 중국 상하이(上海) 등을 누비고 7명의 아이를 더 찾아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 저자가 찾아낸 이들은 대부분 새로운 삶을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저자는 책의 끝에 이르러 고백한다. 낯선 이들의 친절 덕에 삶이 계속된다 해도 트라우마는 극복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트라우마 따위 없는 듯 감췄고, 어떤 이들은 나치에 대한 적극적 복수를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노력은 다른 한편에서 그들의 자녀에게 새로운 상처로 남았다. 성공에 대한 강박으로 양육하거나 큰 미움을 마음에 심어주는 식이었다. 전쟁은 이들의 삶을 넘어 계속되고 있던 것이다. 극복과 치유의 방법을 책은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책을 덮은 뒤 한 가지 생각이 남는다. 잊힌 폭력의 이야기를 끝없이 새롭게 쓰는 것, 그 후 간신히 한 걸음을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420쪽, 2만3000원.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