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뜨겁게, 때론 차갑게… 변화무쌍했던 건반 위 ‘퍼펙트 게임’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라벨 탄생 150주년을 기념한 ‘라벨 전곡 독주회’를 열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미국, 독일,스페인, 영국, 스위스 등을 돌며 전 세계 투어를 진행한다. 조성진 SNS 캡처

■ 조성진 ‘라벨 피아노곡 전곡 연주’ 빈 공연 관람기

피아노 공연선 이례적 3부 구성
재즈 감성부터 스페인 리듬까지
3시간 내내 오점없는 완벽 연주

이어진 팬사인회도 인산인해
임윤찬 “말로 표현 못할 대단함”

빈=장일범 음악평론가·CPBC FM ‘장일범의 유쾌한 클래식’ 진행자

무섭도록 놀라운 긴장감! 첫 곡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부터 마지막 곡 ‘쿠프랭의 무덤’까지 한 곡 한 곡 마치 사선 앞에 선 소총 사격수처럼 조성진의 연주는 모리스 라벨의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콘셉트의 곡들을 초정밀 타격해 나갔다.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라벨의 피아노곡 전곡 연주에 도전한 조성진. 라벨 탄생 150주년에 맞춰 2장짜리 라벨 피아노 앨범을 발표한 그는 앨범 순서대로 총 3부로 구성된 대형 연주를 선보였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 연주가 주로 3부로 구성되지만, 피아노 연주로 3부 구성은 흔치 않은 경우다.

빈에서의 이번 공연은 유럽 투어 중 2번째였다. 조성진은 이틀 전인 23일 독일 에를랑겐의 작은 홀에서 전곡 연주를 하고 빈으로 넘어왔다. 공연 1시간 전이 되자 로비는 많은 인파로 가득했고 그중 한국인 청중들도 매우 많았다. 교민들뿐만 아니라 일부러 조성진과 임윤찬 공연을 보러온 청중들도 상당했다. 이 공연은 이틀 전 마린 알솝이 지휘한 ORF방송교향악단과 임윤찬과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협연에 뒤이은 것이었다. 객석의 4분의 1은 한국 청중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빈 콘체르트하우스에는 꽤 많은 한국팬이 모였다.

오후 7시가 되자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조성진이 등장했다. 그리고 탄력 있고 정숙성 있는 연주가 흘러나왔다. 조성진은 한 섹션이 끝날 때마다 일어서서 청중에게 알듯 모를 듯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이 라벨의 오묘한 색채와 잘 맞아떨어졌다. 조성진의 연주는 타오르는 불과 냉혹한 얼음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얼음의 냉정함이 더 셌다고 할까. 라벨 음악에 대한 정확한 계산이 담겨 있는 지적이고 명민하며 빈틈없는 연주는 청중에게 긴장감을 선사하며 3시간 내내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겼다. 야구로 치자면 투수의 ‘퍼펙트 게임’ 같은 연주, 조성진에게 ‘오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빈 콘체르트하우스 공연 직후 무대 뒤에서 조성진(오른쪽)과 함께한 장일범 음악평론가.

곡들 사이에서 꽃이 피어나듯 등장하는 유명한 걸작들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의 온화하고 따뜻한 기운, ‘물의 희롱’에서 번져나가듯 물의 파장이 손에 만져질 것 같은 입체적 연주, 재즈 감성도 충만했던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프랑스 바로크 음악을 근대적 방법론으로 해석한 ‘쿠프랭의 무덤’까지 조성진의 연주는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 작품을 연상시켰다. 그는 콘서트 무대를 하얀 캔버스 삼아 건반으로 변화무쌍하게 붓칠해 나갔다.

특히 ‘거울’ 중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에서 스페인 리듬을 마음껏 타면서 마치 댄서같이 피아노 위에서 춤추는 것 같은 연주를 들려준 것은 조성진의 이전 연주에서는 볼 수 없었던 놀라운 광경이 아니었나 싶다. 그만큼 조성진의 라벨 연주는 완벽에 가깝게 느껴졌다. 자신감과 명쾌한 터치가 충만했다.

자신의 연주회 이후 이날 공연도 현장에서 지켜본 임윤찬은 감탄을 연발했다.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단함”이라고 호평했다. 오랜 시간 벽돌을 쌓는 것처럼 탄탄하게 해온 준비가 이날 빈에서의 견고한 승리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성진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했나”라고 묻자, “수년간 라벨을 준비해왔다”고 밝혔다.

‘쿠프랭의 무덤’이 끝난 후 청중들은 연신 커튼콜을 요청하고 앙코르를 외쳤다. 하지만 조성진은 피아노 뚜껑을 닫음으로써 청중에게 아쉬운 메시지를 전했다. 대신 이어진 팬 사인회에서 라벨 앨범이 모두 동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 팬들의 성원에 보답했다.

한편 임윤찬은 원래 4월 5일 저녁 소강당 공연으로 초청을 받았으나 그의 티켓이 삽시간에 매진되는 모습을 본 빈 콘체르트하우스 측에서 장소를 대강당으로 바꿔 4월 6일 마티네 공연으로 확정됐다. 임윤찬과 조성진에 대한 열정적 응원으로 공연장마저 바꿔버린 한국팬들의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