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 당하는 ‘중도’[뉴스와 시각]

김윤희 정치부 차장

윤석열 대통령의 검사 재직 시절을 떠올리면 최근의 비상계엄 사태와 부정선거 논란이 더욱 아연해진다. 문재인 정부에 발탁돼 2019년 7월 검찰총장에 취임할 때만 해도 정치권에 알려진 윤 대통령의 정치 성향은 ‘중도’ 또는 잘해야 ‘중도 보수’였다. 윤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정치인들이 “알고 보니 윤 총장 성향이 보수였더라”는 말을 뉴스거리처럼 쏟아내던 때였다.

윤 대통령은 2021년 6월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할 때도 ‘공정과 상식’을 전면에 내세웠다. 자신을 임명한 문재인 전 대통령 국정을 정면 비판하며 대척점에 섰지만, 그가 앞세운 것은 보수의 이념이 아니었다. 윤 대통령이 쏟아낸 법치, 공정, 상식이라는 단어들이 중도층 마음을 사로잡아 대통령 당선에 이르렀다.

정치 초보였던 윤 대통령에게 중도의 길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좌우 극단의 사람들은 큰 목소리를 내지만 중도층은 말이 없다. 중도층은 까다롭기도 하다. 정치인이 상식의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끈질기게 지지하기보다 고개를 가로젓는 편을 택한다. 틀어쥐었다고 생각해도 현안이 터질 때마다 주먹 안의 모래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이들이 바로 중도층이다. 윤 대통령은 이런 어려운 길을 쉽게 포기했다. 취약한 정치 기반이 드러날 때마다 더 자주 대구·경북(TK)을 찾았다. 야당의 세력이 커질수록 윤 대통령은 국민 상식을 떠나 당파성 짙은 유튜브를 가까이했다. 그 결과가 비상계엄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나마 상식적이라고 생각했던 후보가 당선 뒤 가장 비상식적인 방법을 택했을 때 그 피해는 온 국민에게 돌아간다. 정치는 단순한 보수와 진보의 대결을 넘어 망국적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야당은 탄핵을 남발하고 현직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보수층은 한때 진보의 전유물이었던 길거리 시위에 뛰어들었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이런 역사가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 탄핵 심판으로 조기 대선 가능성이 커지자 중도를 표방하는 후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23일 “이념과 진영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고 했다. 분배 대신 성장을 강조하고 ‘적성국’이라 불렀던 일본과의 협력을 말하면서 연일 실용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보수 대 진보 양당 구도로 치러지는 대선에서 중도층의 캐스팅보트 역할이 부각될수록 이런 발언은 더 잦아질 것이다. 그 배경이 무엇이든 이 대표의 변화는 환영할 일이지만, 대선을 앞둔 유권자들의 선택은 더 신중해야 한다.

보수냐 진보냐, 중도인가. 대선 후보를 향한 유권자들의 질문은 향후 5년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가짜 중도’나 ‘가짜 진보’를 막기 위해 정당을 설립하고 정책과 공약을 만든다. 그러나 공당의 대표가 선거를 앞두고 급격한 노선 변경을 꾀한다면 그 의도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합리와 실용, 상식의 후보를 선택했던 유권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미래를 맞아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0대 대선 2년 만에 겪었던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소추, 부정선거 논란이 다시 되풀이되지 말란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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