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사랑으로, 상실을 치유받는 엄마 그렸죠”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어릴 땐 작은 이야기나 쓰는 여성 작가로 남진 않겠다고 교만을 부렸다”는 정 작가는 “지금은 주어지는 지면에 무엇이든 끝없이 써야 한다는 생각뿐”이라고 말했다. 박윤슬 기자

■ 8년만에 장편 ‘3월의 마치’ 펴낸 정한아

VR치료 받는 알츠하이머 배우
가상 아파트서 ‘과거의 나’ 만나
학대 당하고, 자식 잃은 일 직면
고통을 딛는 ‘또다른 사랑’ 조명

드라마 ‘안나’의 원작소설 ‘친밀한 이방인’으로 잘 알려진 소설가 정한아. 8년 만에 장편 ‘3월의 마치’(이상 문학동네)로 돌아온 그를 지난 4일 서울 중구 문화일보사에서 만났다. 전작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 거짓말로 살아간 사람이었다면 이번 작품의 주인공 ‘이마치’는 평생 수많은 배역을 연기해 온 예순 살의 톱스타 여배우다. 소설은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이마치가 ‘가상현실(VR)치료’라는 새로운 치료를 받게 되면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을 신비롭게 그려낸다.


VR치료를 받는 동안 환자는 깊은 잠에 빠진다. 꿈속에서는 ‘라파트멍’ 아파트의 맨 꼭대기인 60층 펜트하우스에서 생활한다. 얼핏 원래 생활하던 공간과 차이가 없는 듯하지만 아파트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25층에 가면 가장 아름다운 나이인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스물다섯의 신인 여배우 이마치가, 31층에는 첫 아이를 낳은 서른한 살의 이마치가 살고 있다. 예순의 알츠하이머병 환자 이마치는 과거의 나와 만나 도저히 돌보지 못했던 젊은 날의 아픔과 미처 만끽하지 못한 채 지나쳐버린 기쁨의 기억을 되살려 나간다.

이처럼 독특한 설정의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었느냐고 묻자 정 작가는 꿈이라고 답했다. “어느 날 꿈을 꿨어요. 여러 나이 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찾아왔죠. 깨어나서도 그 장면은 뇌리에 깊이 새겨졌어요.” 아이디어를 대다수 현대인에게 친숙한 아파트라는 공간에 구현해 낸 것도 인상적이다. “두 아이와 함께 지내며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아파트예요. 아파트란 생각해보면 정말 신기한 곳이죠. 비슷한 형태의 공간인데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각각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고 있으니까요.”

이마치는 7층과 15층에 내려가 배우도, 엄마도 되기 이전에 이미 삶을 헤집어 놓은 유년 시절을 돌아본다.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니와 단둘이 세상에 남겨졌던 기억, 자기만을 생각하며 철저히 자식을 방치한 채 외면하고 학대했던 엄마를 다시 목격하게 되자 직접적인 개입도 서슴지 않는다. 엄마에게는 나름의 복수를 선물하고 어린 나의 작은 손을 잡고 구출해내는 과정을 통해 쓰라린 아픔이 치유돼가는 과정이 펼쳐진다.

이처럼 작가는 화려해 보이는 여배우의 진짜 삶을 처참하게 그려내며 이마치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이 있음을 드러낸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가장 고통스럽게 써내려간 층은 40층이다. 둘째 아이를 잃어버린 마흔 살의 이마치가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며 폐인이 돼버린 곳이다. “40세와 60세의 이마치가 서로를 이해해야 하는데 도저히 방향을 잡을 수 없었어요. 저도 엄마인데 자기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잃어버린 엄마를 어떻게 옹호할 수 있겠어요? 결국 이 소설을 끝맺지 못하겠구나 생각했죠.”

그러나 소설은 마침내 ‘삶의 비밀’을 발견해낸다.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라는 자기 연민 때문에 발견하지 못했다 해도 타인의 미세한 사랑들이 삶을 버티게 했다는 것이다. 특히 엄마 이마치를 향한 아이들의 천진무구한 사랑이 그렇다. “전작을 쓸 때만 해도 엄마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줘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못한 엄마이기에 모성을 고통스럽게 그렸죠.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할 때 1학년이던 제 큰 아이는 5학년이 됐어요. 아이들과 함께 지지고 볶느라 소설이 더뎌졌지만 그 시간 속에서 깨달았어요. 엄마는 아이에게 사랑받으며 또 줄 수 있는 사랑을 채워요. 모성은 곧 치유받음이죠.”

성공적 영상화에 힘입어 원작 ‘친밀한 이방인’은 다시 한 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원작 소설을 펼쳐든 독자들은 입을 모아 ‘이안나’라는 거짓말쟁이가 영상보다 소설에서 더욱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이나 이번 소설 속 여배우 ‘이마치’ 또한 혐오와 폭력의 시대를 그 문법 그대로 살아가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작가 특유의 속도감 있는 전개는 넘기기 시작한 페이지를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 혹시 또 한 번의 영상화를 염두에 둔 건 아니었을까. “소설에는 소설만의 화법이 있어요. 다른 생각을 하며 충실하지 못한 순간에 소설은 망가져 버려요. 제게는 소설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장상민 기자 joseph0321@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