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KBO 심판위원장이 지난 10일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투명 아크릴판으로 만든 가상의 ABS 존에서 스트라이크 콜을 하고 있다. 백동현 기자
■ 데스크가 만난 사람 - 김병주 KBO 심판위원장
Q. 기계장치 도입… 인간 심판의 역할은
美·日리그 아직 못한 ABS 판정
한국 지난해 성공적으로 도입
올해 높이 1㎝ 낮추는 등 보완
1000만 관중시대 좋지만 겁도나
오해 안 사려 사적 관계도 조심
주심 시절 훌륭한 투수 많았지만
이대진 9연속 삼진 가장 인상적
인터뷰=방승배 체육부장 bsb@munhwa.com
정리=정세영 기자 niners@munhwa.com
짧은 머리스타일에 훤칠하면서도 균형 잡힌 당당한 체구와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 야구 팬들에게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이 더 익숙할지도 모를 그는 김병주(57) 한국프로야구(KBO) 심판위원장이다. “조연 역할을 해야 할 심판이 드러나면 안 된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던 김 심판위원장을 설득해 지난 10일 인천SSG랜더스필드에서 만났다. 스트라이크·볼, 아웃·세이프 판정처럼 찰나의 판단을 수십 년 해온 때문인지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군더더기 없이 짧고 간명한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프로야구의 인기가 올해 시범경기에서도 이어지고 있고, 대흥행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게 하지만 그는 오히려 걱정이 많다. 스포츠 경기에서 제일 중요한 건 공정성. 공정성을 책임질 위치에 있는 심판위원장이라는 직함의 무게감 때문이다. KBO는 스포츠의 공정성 추구만을 놓고 봤을 때 150년 역사의 메이저리그(MLB)보다도 앞서 나가고 있다. MLB와 일본프로야구에서도 하지 못하는 자동투구판정시스템(ABS)을 도입해 판정시비를 차단했다. 올해는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한 피치클락(정해진 시간 안에 투구해야 하는 룰)도 새롭게 도입한다. 김 심판위원장은 “심판은 잘하면 본전, 못하면 욕먹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라면서도 “올해는 심판 관련 이슈가 안 나오게 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기계장치가 인간 심판의 영역을 뺏고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김 심판위원장은 “공정성을 추구하는 지금의 시도들이 시대적 흐름에 맞는다”고 했다. 국가·사회적으로도 심판이 흔들리는 요즘에 무겁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오는 22일 프로야구 개막을 앞두고 16경기만 더 하면 3000경기를 채우는 32년 베테랑심판의 야구 조연 인생과 애환, 심판의 역할 등에 대해 들어봤다.
―프로선수(태평양 돌핀스·1991∼1992) 생활을 짧게 하고 심판의 길로 들어섰던데.
“손가락을 다쳤다. 3분의 2가 금이 갔다. 그땐 치료를 잘 안 했다. 손이 울려서 겨울에 방망이로 공을 치지도 못했다. 구단에서 안 되겠다고 보고 내보냈다. 우연히 모교인 마산상고(현 용마고)에서 프로 심판들이 훈련하는 걸 보게 됐다. 심판이라는 직업도 있다고 생각하다 한 번 해볼까 하고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다. 일주일에 5일씩 4주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20명이 지원했는데, 최종 5명이 합격했다. 돌이켜 보면 촌놈이 프로야구 심판하는 바람에 성공했다. 프로야구 2년 선수 생활하다가 낙향했더라면 지금쯤 뭐 하고 있었을까.”
―32년 심판 생활에 후회는 없나.
“어릴 때부터 야구를 했고, 계속해서 한 직장을 다닐 수 있다는 게 행복한 일이다. 현재 2984경기를 했다.”
―경기 뒤 볼 판정에 대한 시비도 적지 않았을 것 같은데.
“물론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운동장에서 하고 끝냈다. 요즘은 그런 게 일절 없다. 경기 뒤 항의 등은 KBO 규칙에서도 금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전국의 야구장을 다녀야 하니 이동 거리도 만만치 않은데 운전 등 편의를 제공받나.
“심판들이 직접 운전을 한다. 6년 전부터 KBO에서 카니발 승용차를 한 조에 2대씩 지급했다. 아침에 출발하면 심리적으로 쫓기기 때문에 야간 이동을 선호한다. 화물차가 많은 고속도로는 피하고 웬만하면 도로가 넓은 고속도를 이용한다. 속도를 내지도 않는다. 일정을 짤 때 이동 거리를 짧게 하려고 노력한다. 심판들이 묵는 숙소도 과거보다 많이 좋아졌다. 현재 비즈니스호텔에 1인 1실을 쓴다. 과거에는 2인 1실이었다. 잘 먹으려고 한다. 지역 맛집들은 꿰고 있는 편이다.”
―경기 중 심판들이 공을 자주 맞는데 고통스러울 것 같다.
“안 맞고 주심을 보려고 하면 꼭 맞는다. 미국의 경우, 심판이 공을 맞으면 무조건 경기에서 빠진다. 내가 맞아 본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스크 밑 턱부위에 공을 맞았는데 턱뼈가 빠진 줄 알았다. 그때부터 마우스피스를 끼고 주심을 봤다. 그리고 희한하게 꼭 장비를 안 한 곳만 맞는다. 예전에는 공에 맞으면 관중들이 박수를 쳤다. 지금은 팬 문화가 발전해서 심판들이 맞으면 격려의 박수를 치고 이름도 연호한다.”
김 심판위원장은 올해 직접 마스크를 쓰지 않지만 전체 심판 50명이 고참과 신참으로 나눠 절반씩 1군과 퓨처스리그 로테이션으로 경기에 투입된다고 설명했다. 게임 수를 조정하고 있는데 5명 정도가 1년에 60∼70경기를 한다고 소개했다. 얘기는 자연스럽게 룰 변화 얘기로 이어졌다.
―지난해부터 ABS가 도입됐는데.
“도입은 획기적이다. 지난해 시즌 시작 때만 해도 과연 성공할 수 있겠나 싶었는데 성공했다. 작년 1000만 관중 동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변의 말이 나올 정도다. 올해 보완해서 지난해 높이에서 1㎝ 낮췄다. 선수들이 구장별 차이를 말하고 있는데 그런 것도 줄이려고 하고 있다.”
―기존 주심들이 보던 스트라이크존과 ABS의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는 높은 쪽 가운데는 모두 스트라이크를 줬다. 코너 모서리는 주기 힘들었다. 그러나 ABS는 규격화가 된 존(zone)이다. 선수들이 초반엔 거부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분들은 ABS가 도입돼서 편하다고 하는데 ABS가 도입됐지만, 심판이 할 역할은 더 있다. 특히 가장 많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귀다. 모든 신경이 귀에 가 있다.”
―피치클락도 올해 도입된다.
“경기 시간 단축을 위해 잘한 결정이다. 3시간이 넘어가면 지루하게 느껴진다. 실제 시범경기 해보니 경기 시간이 줄어들더라. 사실 요즘은 9회 되면 관중들이 다 나간다. 그리고 가족 단위 관중이 많아졌다.”
―체크스윙(하프스윙) 비디오판독이 올해 2군에 도입되는데.
“인간이 한 번에 2가지를 판단하는 일은 힘들다. 과거에는 주심이 체크스윙을 주로 봤다. 지금은 주심이 ABS 판정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귀에 신경이 집중된다. 눈으로 보기 힘들다. 제 관점에서는 주심이 체크스윙을 보는 건데 못 봤을 때 누심에게 어드바이스를 구한다. 주심이 보는 게 개인적으로는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제일 말하기 좋은 것은 배꼽이 90도 돌아갔느냐로 판단한다. 사실 그게 제일 정확하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한 기술의 도입이 맞는 방향이긴 하지만 심판 역할이 갈수록 축소되는데 서운하지 않나.
“줄어든 만큼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게 많아진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 가는 대로 하는 게 맞다.”
―그간 포수들의 프레이밍(포수들이 포구 위치를 속여 볼을 스트라이크로 둔갑시키는 동작)에 많이 속았나.
“인간이기 때문에 많이 속았다. 심판도 포수도 서로를 대상으로 공부한다. 포수가 볼을 뒤로 놓쳤을 때 애매했던 부분도 있다. 다만 실수를 했더라도 보상 판정은 없다.”
―누심을 볼 때 아웃과 세이프 판정 기준은.
“귀로 소리를 듣고 눈은 누를 본다. 그렇게 하라고 교육받는다. 반복적으로 계속하다 보면 자동으로 움직인다.”
―1000만 관중 시대인데.
“1000만 관중 붐이 일어나서 좋은데 겁이 난다. 팬들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심판은 조연이다. 최대한 실수를 줄여야 한다. 경기 뒤 이름이 오르내리면 그건 잘못 본 것이다. 이름이 나오면 이슈화된 것이다. 이름이 안 나오게끔 행동해야 한다.”
―30년여 동안 선수들의 기량 발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특히 투수들의 구종 변화가 많았는데.
“예전에 포크볼이 처음 나왔을 때 마구라고 했다. 심판들이 엄청 노력한다. 스프링캠프 때 나가면, 포수 뒤에서 공을 보면서 신인과 외국인 선수의 새로운 구종을 익힌다. 그리고 외국인이나 신인들에게 어떤 공을 잘 던지는지 물어본다. 인지하고 있어야 공유도 할 수 있다. 스프링캠프 후 회의하면 누가 누가 어떤 구종 등을 던진다고 공유도 한다.”
―포수 뒤에서 바라본 역대 최고 구위의 투수는 누구인가.
“심판들은 구속을 볼 때 종속을 중요하게 본다. 볼 끝에 힘이 붙어오는 것을 말한다. 사실 최동원 선수 시절 주심을 안 해서 공을 못 봤다. 선배들이 워낙 좋았다고 하더라. 내가 본 것은 이대진(해태 타이거즈) 선수가 좋았던 기억이 난다. 9타자 연속 삼진 잡을 때 그 구위, 그리고 정민철 등 그때 내로라하는 투수들 구위가 다 괜찮았다. 지금은 스피드는 빠른데 종속이 그렇지 않게 느껴진다. 전성기 오승환의 경우엔 타자들이 공을 쳐도 볼이 안 나가는 것 같았다. 오승환, 배영수, 정현욱 등이 던진 공은 거의 돌처럼 묵직했다.”
―우리나라 심판 경쟁력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심판들은 공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2017년 WBC 갔을 때 1루에서 심판 보던 중 아웃 판정을 할 때 한국처럼 폼을 크게 해서 했다. 게임이 끝나고 들어왔는데, MLB 관계자가 메이저 심판도 김 심판처럼 동작을 크게 해야 한다고 하더라.”
―비디오판독 결과가 바뀔 때 심판들의 심정은 어떤가.
“물론 받아들여야 하지만 1게임에 2개의 실수가 나오면 멘붕이 온다. 실수에 따른 인사고과도 당연히 있다.”
―체력 관리 비법이 있나.
“잘 자고 잘 먹고, 시합 실수는 당일 잊으려고 한다. 다음날 가져가면 야구장에서 힘들다. 인간이기 때문에 힘들다. 후배들에게 늘 이런 이야기를 한다. ‘성격이 소심한 편인데 바꾸려고 노력했다. 심판은 멘털이 좋아야 한다. 정신력이 강해야 살아남는다’고.”
김 심판위원장은 선수들에게도 가장 인기 있는 심판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정작 본인은 “심판이 인기가 있으면 안 된다”고 했다. 심판이다 보니 야구인들과의 사적 관계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조심스럽다고도 털어놨다. 그는 “제일 어려운 게 그거다. 되도록 오해 안 사려고 행동하려 한다”고 말했다.
‘보크 항의’ 김응용 뒷덜미에 참외 ‘쾅’… “심판생활 중 가장 놀라”
■ 2984경기 출장 KBO 산증인
해태팬의 참외에 김 감독 봉변
김병주 KBO 심판위원장은 KBO리그 2984경기에 출장한 국내 프로야구 역사의 산증인이다.
김 심판위원장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은 바로 ‘김응용 감독의 참외 봉변 사건’이다. 지난 1997년 잠실구장에서 열린 해태와 LG의 경기. 당시 해태가 1-2로 뒤진 3회 말 1사 2루의 LG 공격에서 해태 강태원이 투구 동작을 취하는 순간 타석에 있던 심재학이 타임을 부르며 타석을 벗어났다. 그러나 당시 주심을 맡은 김 심판위원장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강태원은 공을 던지려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섰다. 김 심판위원장은 투수 보크를 선언했고 김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뛰쳐나와 ‘왜 보크냐’라며 항의했다.
그런데 이때 관중석에서 팬이 던진 참외가 김 감독의 뒷덜미를 강타했다. 참외는 해태 관중석에서 날아왔는데, 김 심판위원장을 겨냥했음이 분명했다. 김 감독은 곧바로 코치들의 부축을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김 심판위원장은 “심판 생활을 하면서 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면서 “그때 엄청 놀랐다. 김 감독님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퍽 하는 소리가 났고, 이게 무슨 일이야 했는데 제 옷에 참외 씨가 튀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김 심판위원장은 “그런데 당시 김 감독님이 들어갔다가 30초 뒤에 다시 나와서 항의를 했다. 정말 열정적인 분이다. 그때의 장면이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30년 이상 선수들 플레이를 눈앞에서 본 김 심판위원장은 ‘명판관’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김병주 = 명판관’ 공식을 많은 이의 뇌리에 심은 장면이 있다. 2023년 6월 3일 사직 KIA-롯데전. 당시 2루심을 맡은 김 심판위원장은 9회 말 무사 1루에서 박승욱의 도루를 세이프 선언했는데, 비디오판독 끝에 원심 세이프가 유지됐다. 김 심판위원장이 2루수 앞에서 무릎을 꿇고 2루 경합 장면을 살펴보는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잡혔고, 팬들은 “진짜 프로정신을 가진 심판”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