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랜토리노 속 품위있는 죽음… 한국보수, 그길로 가야 다시 살아나”

클릭하시면 더 큰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7일 서울 강남구에서 신간 ‘한국이란 무엇인가’를 든 채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교수는 “정면 사진은 부담스럽다”며 책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웃어 보였다. 윤성호 기자

■ ‘한국이란 무엇인가’ 출간한 김영민 서울대 교수

“우린 아직 이사태를 이해못해
그러니 해결할 수도 없는 거죠”

“무책임하게 처방 내놓는 사람
속된 말로 약을 팔고 있는 셈”

“해답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질문 자체가 나아갈 길 열어줘”

“지금 무책임하게 처방을 내놓는 사람들은 속된 말로 약을 팔고 있는 셈이죠.” ‘추석이란 무엇인가’ 등의 칼럼으로 잘 알려진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최근 ‘한국이란 무엇인가’(어크로스)를 내놓고, 혼돈에 빠진 한국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 대통령 탄핵 이후 답을 찾지 못한 정치권과 한국 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일까. 탄핵 선고 직전에 출간된 책을 들고, 7일 서울 강남구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명쾌한 해답이나 통렬한 비판을 기대했건만 김 교수에게 돌아온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아직 이 사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해하지 못했으니 해결할 수도 없는 거죠.”

김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 사회의 실패는 검찰 권력의 비대화나 특정 정당의 폭주, 헌법 체계의 문제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이번 사태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언어의 실패’다. ‘언어의 실패’란 말은 김 교수가 오랫동안 지적해온 한국 사회의 총체적 문제를 함축한다. 진보와 보수,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기본 개념조차 제각기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사회. 서로 다른 언어와 규범 안에서 살아가며, 정작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회. 김 교수는 이것이야말로 현재 한국이 처한 “자연 상태”라고 진단한다. “우리가 가진 언어의 빈곤은 곧 사유의 빈곤으로 이어져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도구로서 언어가 망가져 있다면, 그 사회는 스스로를 제대로 진단할 수도 없죠.”

그렇다면 지금 준비해야 할 것은 ‘죽음’이다. 김 교수가 말하는 현재 한국 보수 진영의 현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어떻게 품위 있게 죽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정치권에는 언어가 빈곤하다. 그는 ‘품위 있는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뜻밖에 미국 영화 ‘그랜 토리노’를 인용했다. 감독이자 극 중 주인공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늙고 고집스러운 퇴역 군인이지만, 결국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며 품위를 지킨다. 김 교수에 따르면 품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보수 정치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다. 망가진 언어와 감정적 정치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 환경에서 보수가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먼저 ‘어떻게 품위 있게 사라질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는 본래 현재를 긍정하고, 지금까지의 성취를 존중하는 데서 출발해야 해요. 그런데 요즘은 판을 갈아엎자는 말이 오히려 보수 쪽에서 나오죠. 그건 자기 정체성을 버린 겁니다. 죽을 수밖에 없다면 죽어야겠죠. 그게 보수가 원래 지켜야 할 가치고 그 죽음을 통해 오히려 부활할 수도 있어요.”

이처럼 그는 언어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문화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책을 통해서도 그는 드라마 ‘킹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등을 인용해 사회현상을 설명한다. 특정 콘텐츠를 인용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막연한 개념어보다 문학이나 예술은 맥락을 풍부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개념을 직접 정의하기보다 그 개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정치사상가의 언어이자 정치사상가로서 그가 “언어를 다시 갈고닦는” 방식이다.

김 교수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일종의 (준)‘자연 상태’라는 것을 재차 강조했다. 정치 질서와 사회적 규범, 심지어 헌법 정신까지 모두 제각기 작동하며 공통된 기준이 무너진 상태. 그나마 간신히 붙잡고 있던 법적 권위조차 흔들린 지금, 공동체는 새로운 질서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탄핵 이후 개헌 논의가 급부상하고 있지만, 지금은 단순히 헌법의 문제가 아니고 검찰 권력의 문제가 아니고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헌법을 고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것은 속 시원하게 들릴 수 있다”면서도 김 교수는 “한국의 시스템에 대해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태도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문제를 좁혀 정의하고 단기적인 처방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한국 정치가 쌓아온 누적된 모순을 덮는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질문을 던진다. 한국이란 무엇인가. 명쾌한 해답은 없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익숙했던 언어와 관습, 사고방식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김 교수는 “해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연다”고 말한다. 그것이 언어를 다듬는 일이고, 정치사상을 다시 쓰는 이유다. 숙고 없는 조급함 대신, 새로운 언어와 개념을 통해 지금 이 혼란을 제대로 응시하자는 그의 제안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향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디에 도달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자연 상태로 돌아간 한국 사회는 여기서 다시 출발한다.

신재우 기자 shin2roo@munhwa.com